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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

지식루프 2025. 7. 12.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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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의 실질적인 시작으로 평가받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1. 배경

  • 재정 위기: 루이 16세 통치기의 프랑스는 미국 독립 전쟁 참전 등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 삼부회 소집 및 갈등: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75년 만에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가 소집되었으나, 표결 방식과 특권 계급의 기득권 유지에 대한 평민 대표(제3신분)들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 국민의회 결성 및 탄압 시도: 제3신분 대표들은 자신들이 국민을 대표한다며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를 결성하고, 헌법 제정을 위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발표합니다. 루이 16세는 이를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파리 주변에 군대를 집결시켜 국민의회를 무력으로 탄압하려 했습니다.
  • 네케르 재무 장관 파면: 1789년 7월 11일, 루이 16세가 국민의 신임을 얻고 있던 개혁 성향의 재무 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하자, 파리 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는 왕실이 반혁명 세력의 뜻에 따라 국민의회를 탄압하려는 의도로 비춰졌습니다.
  • 무기 확보의 필요성: 파리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할 필요성을 느꼈고, 무기 확보를 위해 당시 많은 총과 탄약이 저장되어 있던 바스티유 감옥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2. 전개

  • 1789년 7월 14일: 분노한 파리 시민들과 민병대(국민방위대) 약 1천여 명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갔습니다.
  • 바스티유 감옥: 바스티유는 본래 중세 시대에 요새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로, 절대왕정 시기에는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압제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실제 수감된 죄수는 7명에 불과했지만, 많은 무기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 공성 및 함락: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의 무기 인도를 요구했으나, 사령관 드 로네는 이를 거부하고 발포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감옥을 향해 총과 대포를 쏘며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오후 5시 30분경 바스티유는 함락되었습니다.
  • 결과: 전투 과정에서 약 100여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고, 수비대 병사 1명도 사망했습니다. 함락 후 드 로네 사령관과 파리 시장 드 플레셀은 분노한 군중에게 살해당하고 그들의 목은 창끝에 꽂혀 파리 시내를 돌며 전시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있던 소수의 죄수들이 석방되었습니다.

3. 결과 및 의의

  • 프랑스 혁명의 시작: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은 단순한 폭동을 넘어선 국민들의 봉기이자, 프랑스 혁명의 서막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 절대왕정의 몰락 가속화: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와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왕권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루이 16세는 결국 파리 주둔 군대를 철수시키고 네케르를 복직시키며, 부르주아 민병대인 국민방위대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혁명의 확산: 바스티유 함락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영주와 귀족들이 살해되고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는 등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국민의 힘 자각: 시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압제의 상징을 무너뜨렸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이후 혁명 과정에서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됩니다.
  • 프랑스 국경일: 7월 14일은 현재까지도 프랑스 혁명 기념일이자 프랑스의 최대 국경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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